도시계획, 그 잔혹한 시작: 식민 지배하 경성(서울) 도시 구조의 변화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서울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거대 도시입니다. 하지만 이 도시의 근본적인 뼈대가 언제, 그리고 누구의 필요에 의해 설계되었는지 알고 계신가요? 바로 *일제강점기*라 불리던 시절, 식민 통치를 위해 단행된 도시계획에 그 뿌리가 있습니다.
겉으로는 근대화와 위생 개선이라는 명분 아래 이뤄진 이 도시계획은, 실상은 일본인 중심의 공간 구조를 만들고 조선인들을 주변부로 밀어내는 식민 지배의 폭력적인 도구였습니다. 일제강점기 경성의 도시계획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도시 구조를 어떻게 변화시켰으며, 그 과정에서 어떤 사회적 문제를 야기했는지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1. 식민 통치와 도시계획의 만남: '시구 개정 사업'의 출발
일제는 대한제국을 병합(1910년)한 후, 수도 한성부를 경성부로 개칭하고, 식민 통치에 적합한 도시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습니다.
1.1. 군사 및 행정 중심의 재편
경성에서 가장 먼저 시작된 도시계획은 *시구 개정 사업*이었습니다. 이는 1910년대에 집중적으로 이뤄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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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의 파괴: 기존 도시의 경계이자 상징이었던 *성곽*과 성문이 대거 파괴되었습니다. 이는 도시의 확산을 가로막던 물리적 장벽을 제거하고, 일본 군대와 자본의 이동을 원활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특히 숭례문 주변과 광화문 일대의 성벽이 파괴되고 도로가 확장되면서 전통적인 공간 질서가 무너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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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선 도로 정비: 좁고 구불구불했던 조선의 전통적인 도로는 폭이 넓고 곧은 격자형(Grid Type) 간선 도로망으로 정비되었습니다. 이는 교통의 효율성을 높여 물자의 수송과 식민 통치 기관의 접근성을 개선하는 목적이 컸습니다. 오늘날 서울 사대문 안의 주요 도로망 대부분이 이때 만들어진 것입니다.
1.2. 일본인 주거지 중심의 개발
일제의 도시계획은 철저히 일본인 거류지를 중심으로 전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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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촌(南村) 중심의 근대화: 이미 개항기부터 일본인들이 집중 거주했던 남산 아래(남촌), 용산 지역은 근대적 상하수도, 전기, 공원 등 최신 도시 인프라가 집중적으로 투자되었습니다. 반면, 조선인들이 주로 거주하던 북촌(北村) 지역은 위생 시설이 열악하고 개발이 지연되어 조선인과 일본인 거주 지역 간의 도시 인프라 격차가 극심해졌습니다.
2. '조선 시가지 계획령'과 도시의 급격한 팽창
1930년대에 들어서자, 일제는 도시문제를 해결하고 식민 통치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본격적인 도시계획 법규를 마련합니다.
2.1. 대경성의 구상과 행정구역 확대
1934년 *조선 시가지 계획령*이 제정되면서 경성의 도시계획은 더욱 체계화되고 대형화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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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부의 확장: 1936년 경성부의 행정구역은 기존보다 약 4배가량 대폭 확장되었습니다. 이는 주변 지역을 흡수하여 *대경성*이라는 근대적인 산업 및 행정 도시를 만들려는 구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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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구획 정리 사업: 도시 확장에 따라 무질서하게 난개발되는 것을 막고, 일본 자본의 토지 투자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토지 구획 정리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행되었습니다. 이 사업은 토지 모양을 반듯하게 정리하고 도로를 개설한 후, 개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토지의 일부(체비지)를 매각하는 방식이었습니다.
2.2. 토지 구획 정리의 이면: 수탈과 투기
겉으로 보기에 합리적인 도시 개발 방식이었지만, 이 사업의 이면에는 식민 지배의 수탈 구조가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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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 정보 독점: 토지 구획 정리 사업은 개발 정보가 철저히 비밀에 부쳐진 채 진행되었고, 일본인 투기꾼과 자본가들이 정보를 미리 입수하여 토지를 선점하고 막대한 이익을 독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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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이주와 빈민화: 도시 확장에 따라 경성으로 인구가 폭발적으로 유입되면서 주택난이 심각해졌습니다. 재개발 지구의 조선인 원주민들은 보상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도시 외곽의 토막촌이나 열악한 주거지로 밀려나 도시 빈민층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3. 경성의 양면성: 근대적 외피와 식민지적 본질
일제강점기 경성의 도시계획은 도시를 근대화하고 위생 문제를 개선하는 등 긍정적인 '형식'을 갖추었으나, 그 '본질'은 식민 지배를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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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능 분리와 계층 분리: 도시 중심부는 총독부, 경성부청, 주요 은행 등 식민 통치 기관이 자리 잡았고, 상업 지역과 주거 지역이 분리되는 근대 도시의 기능 분화가 이뤄졌습니다. 하지만 이는 곧 권력층(일본인)의 생활 공간과 피지배층(조선인)의 생활 공간을 분리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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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문제의 심화: 급격한 인구 증가와 토지 수탈로 인해 주택난, 빈부 격차, 위생 문제 등의 도시 문제가 극에 달했습니다. 이는 식민지 도시가 안고 있던 불균형적인 성장의 명확한 증거였습니다.
4. 오늘날 서울에 미친 영향
일제강점기 경성의 도시계획은 광복 이후 서울의 도시 구조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사대문 안의 간선도로망과 용산, 영등포 등 공업 및 교통 요지의 배치는 모두 이때 형성된 뼈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역사를 단순히 '근대화'로만 볼 수 없습니다. 도시계획이라는 근대적 시스템이 식민 지배의 수탈 도구로 어떻게 변질될 수 있는지 보여준 잔혹한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도시 계획을 논할 때도, 우리는 이 역사를 반면교사 삼아 모두를 위한 포용적인 도시 발전의 중요성을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